로마에서 티볼리로, 고속도로 위의 짧지만 깊은 여정
로마에서 티볼리로 향하는 길은 멀지 않았다.
지도상으로는 가까운 거리지만, 나는 A24와 E80 고속도로를 이용해 천천히 이동했다.
이 길은 유료 도로였고, 자연스럽게 유럽의 고속도로 시스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의 여행에서 느낀 바로는,
유럽 국가들 중 고속도로를 대부분 유료화한 나라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였다.
이 점에서 보면 한국이나 일본과도 닮아 있다.
이탈리아의 고속도로 통행료 지불 방식은 우리와 유사하면서도 단순했다.
후불 결제 방식의 하이패스와 유사한 ‘텔레패스(Telepass)’가 있지만,
단말기를 구입하거나 렌트해야 하고,
이탈리아 은행 계좌가 있어야 원활하게 사용 가능한 구조였다.
여행자에게는 사실상 그림의 떡인 셈이다.
선불카드인 ‘VIA 카드’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실사용자는 드문 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행자, 심지어 현지인들조차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은
티켓을 뽑고 출구에서 요금을 확인한 뒤 현금이나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전통적인 방식이다.
나 역시 이 방법을 사용했다. 단순하고 명확해서 좋았다.
시간과 공간이 정원으로 응축된 곳, 빌라 데스테
티볼리로 향한 오늘의 목적지는 바로 빌라 데스테(Villa d’Este)였다.
이 별장은 1550년경, 교황 선출에 실패한 이폴리토 데스테(Ippolito d’Este) 추기경이 은거하며
자신의 이상을 담아 지은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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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애 이후, 당대의 천재 건축가 로렌초 베르니니(Lorenzo Bernini)의 손을 거쳐 완성된 이곳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이후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빌라 데스테의 진가는 바로 그 지형에서 시작된다.
험준하고 가파른 절벽 위, 쓸모없을 법한 땅을 아름다운 정원으로 재창조해낸 상상력과 기술력.
수많은 분수들이 지형의 굴곡에 맞춰 배치되어 있고,
단 한 대의 펌프도 없이 물의 낙차와 압력을 이용해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분수들은
과학과 예술이 만난 절묘한 조화였다.
이토록 정교한 물의 움직임을 설계할 수 있었던 이들은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라,
수리역학에 정통한 선구적인 과학자들이기도 했던 셈이다.
놀라운 점은 이 모든 것이 16세기,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 중기인 명종 시대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분수는 그보다 훨씬 더 이전인 고대로마 시대부터 존재했다.
이 나라는 그야말로 물과 분수의 문화가 깊이 스며 있는 땅이다.
더운 여름철, 습도는 낮고 태양은 따갑게 내리쬐니 물을 활용한 쿨링 시스템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보습 화장품이 발달한 것도 같은 이유겠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8월의 햇살과 맞서는 여행자들
우리가 빌라 데스테에 도착한 시각은 8월 중순,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시점이었다.
태양은 뜨겁게 내리쬐었고, 그늘을 찾아 걷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 만큼 강렬한 햇살이었다.
그러나 여행자의 본능은 그런 유혹을 뿌리치게 만든다.
결국 우리는 그늘 대신 가파른 계단을 따라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 곳곳에 설치된 분수들은 시원한 물줄기와 함께 청량한 소리를 내며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각각의 분수에는 테마가 있었고, 이름이 붙여져 있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오르간 분수(Fontana dell’Organo)’였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이 분수는 정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고,
내부에는 실제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다.
물이 떨어지며 만들어내는 공기의 흐름으로만 연주되는 방식이었다.
운 좋게도 우리가 도착했을 때 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졌고,
순간 정원은 고요한 신전처럼 숭고하게 느껴졌다.
또 다른 흥미로운 분수는 ‘올빼미 분수(Fontana della Civetta)’였다.
아름다운 도자기 장식과 함께, 수압으로 작동하는 장치가 있어 새소리가 나는 구조였다.
꼭대기에 설치된 올빼미는 맹금류의 출현을 상징하며,
주변 새들이 흩어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유쾌하고 창의적인 상상이 담긴 예술작품이었다.
또 한 곳은 로마의 건국 신화가 조형물로 표현된 ‘로마 분수’.
창을 든 여신의 옆에는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늑대의 젖을 빠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었고,
그 앞의 ‘백 개의 분수(Fontana dei Cento)’는 3단 구조로 이어지는
긴 수로에 걸쳐 백여 개의 분수구가 정렬되어 있었다.
물소리와 시각적 화려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작은 도시, 커다란 유산
여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시간이 압축된 공간을 만나는 일이다.
티볼리는 단순히 로마 근교의 관광지가 아니었다.
그 속에는 교황의 야망,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과 예술,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정원의 마법이 함께 녹아 있었다.
그 빛나는 오후, 나는 뜨거운 햇살 속에서도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잠시 시간 여행을 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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